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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과 관련된 이야기나 모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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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92건 작성일 16-06-0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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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기다 써도 될까? 현 소유주나 이동경로, 또는 이름 유래나 관련 에피소드 같은것들ㅇ0ㅇ!

댓글목록

익명님의 댓글

익명 #21499 작성일

오사카성 이야기를 할 때 유저들 사이에서 오니마루가 언급되는 건 오니마루를 만든 도공이 아와타구치 쿠니츠나이기 때문.

익명님의 댓글

익명 #21505 작성일

큐슈 박물관에 한정전시되었을 때의 설명에 따르면, 코우세츠 사몬지는 엄연히 태도이지만 실제로는 타도에 더 가깝게 쓰였다고 한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21517 작성일

톤보키리와 타로타치를 2차창작에서 '아네가와조'라고 묶어 부르는 이유는 톤보키리의 전 주인(혼다 타다카츠)과 타로타치의 전 주인(마가라 나오타카)이 둘 다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했기 때문. 각기 적대 세력 소속이었기에, 이 싸움에서 서로 겨루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타로타치의 전 주인은 이 싸움에서 죽었지만 톤보키리의 전 주인이 죽인 것은 아니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22252 작성일

최근 발견된 이마츠루일지도 모르는 단도 얘기도 해도 돼?

 

이 단도의 명문은 산죠 무네치카라고 되어있고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단도에 대한 얘기가 지역 전승으론 있다나 봐.

그래서 요시츠네의 단도일지도 모르는 단도가 발견되었다고 한동안 시끄러웠었구.

 

전문가들의 감정으로는 최소한 명문은 진품이라고 했고, 야마시로덴의 특성을 잘 잇고 있어서 진짜일 가능성도 높다고 하지만

소유자가 그냥 동네 할아버지라 정밀감정은 거부하셔서 더이상 알아볼 수 없는 상태라고 해.

그래도 오래된 도검임은 확실한 모양인지 伝三条宗近라고 도공명을 밝히고 전시회도 할 예정이라고 함.

 

솔직히 호네바미도 伝粟田口吉光니깐 저건 전문가들이 눈감정으로 거의 무네치카작임을 확신했다고 봐도 되는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더더욱 정밀감정해서 산죠인지 아닌지 확실해졌음 하는 마음이 강함... 

익명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22288 작성일

난입이지만 호우키보시 무네치카라고 이름 붙여진 단도가 얘 맞던가?

익명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22604 작성일

그렇당.. 전승 겹쳐서 아마 도검에는 호우키보시로 나오진 않을것같쟝

호우키보시로 확정될 때의 전시자료에 의하면 '이마노츠루기라고 불리고도 있다'라고 해서 아마 저게 무네치카 진품으로 확정이 나면 이마노츠루기로 확정되는 상황인 것 같아. 

익명님의 댓글

익명 #91466 작성일

새로운 남사들도 많이 늘어났으니까 좀더 보고 싶다ㅇㅅㅇ)9 

익명님의 댓글

익명 #91469 작성일

오오, 흥미롭다. 나도 일본도에 대해 좀 공부하고 싶은데, 책 찾아보니 다 원서더라 ㅠㅠㅠ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503 작성일

좋은 스레 펍 ㅇ0ㅇ)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510 작성일

오오 정말 고맙다죠

스크랩!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524 작성일

이는 스크랩 밖에 없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538 작성일

정말 사소한 거라도 적어봐도 될까?

모노요시의 경우 소장처에서는 협차로 표기하고 있고 인게임에서도 협차로 실장되었지만, 문화재 등록에는 단도로 표기되어있다. 일본의 다른 자료에서도 단도로 표기하고 있는 곳도 많다. 시대적으로 볼 때는 단도로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길이로는 1척 9푼 5리(33.2cm)여서 협차 기준(1척 이상 2척 미만)에는 맞고, 단도치고는 많이 길긴 하다.



킷코 사다무네는 당시의 다른 도검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태도 혹은 대태도였지만 나중에 도신을 갈아내서 타도가 되었다. 귀갑문양은 도신을 갈아낼 때 새긴 것.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562 작성일

BS후지에서 방영했던 일본도의 유혹이라는 다큐에서 나왔던 이야기인데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지금 우츠시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무칸사의 한사람인 도검 작가 미야이리 노리히로 씨가 의뢰 받아서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의 우츠시 제작을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는 원래 긴 태도로 제작되었지만 역대 주인 중 누군가의 키에 맞춰 스리아게했다고 해. 미츠타다의 우츠시 제작을 맡은 작가님은 그게 오다 노부나가일 거라고 추정하고 있고...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0669 작성일

[스크랩]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9640 작성일

내가 혼자 보려고 정리한 거라서 번역에 이상한 부분이 있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혹시 도움될 수도 있으니 범펍하는 겸 올려봄!! 문제 있음 말해줘ㅠㅠ!

 

 

 

 









야겐토시로薬研藤四郎



 

 

가마쿠라 시대, 단도 제작의 명공이라 불리는 아와타구치 요시미츠의 대표작 중 하나. 칼날 길이 8촌 3분 (25.1cm)로 평구조.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소유였던 단도로 추정되며 메이토쿠의 난明徳の乱 (1391年) 직후에 쓰여졌다고 하는 메이토쿠기明徳記에서 나오는 야겐토오시薬研通し와 동일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御所様(義満)其日の御装束は態と御小袖をばめされず、ふすべ革の御腹巻の中二通り黒皮にて威したるを召し同毛の五枚甲の緒をしめ、累代御重宝と聞へし篠作と云御佩刀に二銘と云御太刀二振そへては佩刀給ふ、薬研通しと云御腰の物をさゝせたもう云々…… 

 

 




당시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10세의 나이로 제3대 쇼군이 되었으나 슈교다이묘가 할거한 탓에 권력 기반이 매우 불안정했다. 이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권력을 쥘 수 있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메이토쿠의 난으로, 야마나 우지키요의 일족이 반란을 일으켜 메이토쿠 2년 12월에 거병하여 교토로 쳐들어온 사건을 말한다. 메이토쿠기에 출진하던 날 요시미츠의 차림새가 어떠했는지 기록되어있는데 그게 위의 글 중 굵음 표시가 된 부분이다. 이때 야겐토오시를 지닌 채 출진하였음이 나와있는데 칼날 길이는 불분명하나 중심 길이로 보았을 때 야겐토시로이거나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요시미츠 다음 소유주로 알려진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기의 무장인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엔토쿠 원년(1489年), 제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롯카쿠 가문을 토벌하던 도중 병사. 호소카와 마사모토(무로마치 시대 중 후기에 걸쳐 활약한 아시카가 가문의 방계인 센고쿠 다이묘 호소카와의 당주) 가 차기 쇼군으로 아시카가 마사토모의 아들이자 쇼군 요시히사의 사촌형으로, 출가한 세이코 (후의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추천하나 8대 쇼군 요시마사의 정실인 히노 도미코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배후공작을 하여 아시카가 요시미의 아들이자 요시히사의 사촌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키(후의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제10대 쇼군으로 취임한다. 

 

이후 마사모토와 마사나가의 사이는 급격하게 나빠진다. 요시키가 쇼군이 되면서 아시카가 요시미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의 권세는 강화되고 엔토쿠 3년(1491年) 1월에 요시미가 사망한 이후 하타케야마 마사나가가 막부 권력을 독점한다. 이후 메이오 2년(1493年) 요시키는 마사나가와 함께 마사나가의 정적인 하타케야마 요시토요(畠山義豊)를 토벌하기 위해 가와치 국으로 출병한다. 

 

그런데 이때 요시토요 토벌에 종군하지 않고 교토에 잔류하고 있던 마사모토는 히노 도미코, 이세 사다무네 등과 연합하여 쿠테타를 결행하는데 이전부터 쇼군 후보로 추천했던 세이코를 제 11대 쇼군으로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마사나가의 측근이었던 유력 슈고 다이묘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마사모토 측으로 돌아서면서 마사나가는 자결, 투항한 요시키는 교토 류안지(竜安寺)에 유폐되었다.



이때 야겐토시로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마사나가가 메이오 9년 (1500年) 4월 9일, 자결하기 위해 이 단도로 배를 세 번이나 그었으나 칼이 살을 긋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않아 홧김에 집어던졌는데 이 단도가 근처에 있던 약연 (薬研, 한약방에서 쓰는 도구로 약재를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도구)을 한 번에 뚫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마사나가의 부하가 자신의 패도, 노부쿠니(*남북조시대의 도공)의 단도로 자신의 무릎을 두 번 찌른 후 마사나가에게 내밀었고 마사나가는 이 단도로 자결했다. 이때 도공 요시미츠가 만드는 단도는 매우 예리하나 주인의 배는 가르지 않는다고 유명해지고 야겐토시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러한 야겐토시로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의 일화가 실린 것은 하타케야마기畠山記. 만일 이 하타케야마기가 맞다면 마사나가 때에는 하타케야마에 있었으나 그 후 막부에 돌아온 것이 된다. 요시미츠가 죽고 요시마사가 8세의 나이로 쇼군 자리에 올라 덴노의 조정이나 슈교다이묘들의 개입이 격렬해졌는데 성장해서도 정치 개입을 허용한 탓에 쇼군 가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후 후계자가 없어 동생을 환속하여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는데 후계자가 태어나고 하타케야마의 후계자 분쟁까지 더해여 장장 10년에 걸친 오닌의 난이 발생했다. 만약 하타케야마가 야겐토시로를 갖게 되었다면 1467년 발발한 오닌의 난부터 다음 쇼군이 된 요시히사가 병사한 1489년 사이로 보인다.



 

 

마사나가 이후의 소유주는 마츠나가 히사히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츠나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헌상하여 이후 계속 노부나가의 소유가 된다. 에이로쿠 원년(1558年), 요시테루가 교토로 돌아온 뒤에도 미요시 나가요시(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유력 중신이었던 미요시 모토나가의 적자로, 모토나가를 두려워한 하루모토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 당한 뒤 가와치슈고다이인 기자와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섬긴다. 덴분 8년(1549年)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불만으로 병력을 이끌고 상경하여 무력으로 옛 영지를 돌려 받는데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나가요시를 두려워해 오미로 도주하고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롯카쿠 사다요리에게 나가요시와의 화친에 힘쓰도록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나가요시는 셋츠슈고다이, 고시미즈 성 성주가 되고 호소카와 가문의 중신으로 충실히 근무하며 적대세력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이후 호소카와 가문의 최고 실권자로 부상하게 되는데 덴분 17년(1548年) 하루모토와 적대하고 있던 호소카와 우지츠나 측으로 배신하고 덴분 18년(1549年) 하루모토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오미로 추방하여 적대하던 친척인 미요시 마사나가까지 토벌한다.

 

 이렇게 호소카와 정권이 무너지고 미요시 정권을 탄생 시킨 인물) 의 권세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타케야마 다카마사나 롯카쿠 요시카타가 기나이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미요시 일족의 요시카타가 쿠마이덴(久米田)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등 미요시 집안에 쇠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에이로쿠 5년(1562年) 나가요시와 손잡고 막부의 정치를 독점하던 만도코로의 집사 이세 사다타카(伊勢貞孝)가 나가요시와 반목하게 되면서 요시테루는 나가요시를 지지하면서 사다타카를 경질하고 셋츠 하루카도(攝津晴門)를 만도코로의 집사로 앉혔다. 격노한 사다타카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9월에 나가요시에게 토벌된다. 이렇게 쇼군의 개입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의 영향력을 보유해온 이세 집안에 의한 만도코로 지배는 막을 내리고 쇼군이 만도코로를 장악할 단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기에 에이로쿠 7년(1564年) 7월,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한다. 

 

정적이 모두 사라진 요시테루는 이것을 기회로 삼으려고 하나 나가요시의 사후에 막부를 배후 조종하려던 마츠나가 히사히데나 미요시 산닌슈(三好三人衆)에게 방해물로 낙인 찍힌다. 이에 그들은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의 양자인 요시츠나(義維)와 손잡고 요시테루를 제치고 요시츠나의 아들인 요시히데(義英)를 새로운 쇼군 후보로 세운다.



한편으로 요시테루가 의지하고 있던 오미 롯카쿠는 에이로쿠 6년(1563年)의 간논지(観音寺)에서 있었던 소동 이후 영지 오미를 떠나 교토로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에이로쿠 8년(1565年) 5월 19일, 히사히데와 산닌슈는 주군인 미요시 요시츠구(三好義繼, 나가요시의 조카)와 함께 요시히데를 앞세워 모반을 일으키며 요시테루의 본거지인 니조고쇼(二條御所)로 쳐들어간다. 이것이 에이로쿠의 변(永綠の變)이다. 요시테루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등에게서 사사받은 검술의 달인으로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사. 마지막에는 암살자들이 사방에서 다다미를 방패삼아 한꺼번에 돌진해 요시테루를 죽였다고 한다. 

 

향년 30세(만 29세). 이때 셋츠 하루카도의 적자 치요마루(千代丸)와 요시테루의 생모 게이쥬인(慶壽院)도 함께 죽었다고 한다. 이때 살해당한 요시테루에게 히사히데가 야겐토시로를 빼앗는다.



이후 노부나가가 상경했을 때 히사히데는 츠쿠모카미나스九十九髪茄子를 항복의 의미로 요시미츠의 칼과 함께 바쳤고, 이후 겐키 4년(1573年) 정월에 후도쿠니유키와 함께 야겐토시로를 헌상했다고 한다. 

 

 




角て松永親子、元亀四年正月十日、岐阜へ参向し、御礼申、不動国行の刀、薬研藤四郎の脇指など進上申しけり。

(信長記) 

 

 




덴쇼 8년 (1580年) 2월 22일에는 츠다 소규에게 자신이 소장하고있던 스물 두 자루의 칼을 선보였는데 이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同二月廿二日 上様御前ニて 於京都

御脇指 十四腰 御腰物 八腰

 薬研透吉光(薬研藤四郎)

(天王寺屋会記) 

 

 

이후 혼노지의 변(1582年), 음력으로 6월 2일, 양력으로 6월 21일에 혼노지에서 발생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상이 열린 사건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소실. 오다 노부나가는 상당히 야겐토시로를 애용했다고 하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실제로 야겐토시로가 혼노지에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과 재고의 여지가 있는데 도쿠가와 막부까지 야겐토시로일 가능성이 있는 기록물이 존재하기 때문. 허나 혼노지의 변 이후의 기록에선 나와있는 길이와 야겐토시로의 길이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 그저 비슷한 다른 검이란 설이 더욱 유력하다.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와 분신되었을 가능성을 가장 높게 친다. 

 

 

 

 










정리하면서 왜 야겐이 전장에서 자랐다고 했는지 알겠더라 소유주도 꽤 많이 거쳤지만 완전 수라장이었잖아 ;ㅇ;....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9770 작성일

야겐 번역니와 고마워 잘 읽었다ㅇㅅㅠ)9 야겐 전장출신이래서 그냥 전쟁할 때 자주 들고다녔나보다 했는데 뭐야 이 수라장..

익명님의 댓글

익명 #239858 작성일

스크랩!!

익명님의 댓글

익명 #266114 작성일

유용한 스레쟝! ㅇ0ㅇ)/[스크랩]

익명님의 댓글

익명 #266148 작성일

아즈키 나가미츠는 실존 여부가 불투명하다. 실존했던 칼이라는 설과 다른 칼들의 설화가 합쳐지거나 와전되어 전해진 가상의 칼이라는 설이 공존.

 

"아즈키는 실제 있었던 칼이다"

- 아시카가 시에 위치한 쵸린지(長林寺)에서 아즈키 나가미츠로 추정되는 일본도의 사진이 찍힌 것이 있다.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만 전해진다)

- 우에스기 가에서는 나가미츠를 여러 자루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아즈키로 유력한 칼이 '우에스기 가 선정 35자루' 중 하나인 '나가미츠'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즈키의 전 주인은 우에스기 켄신)

 

"아즈키는 실존하지 않았다"

- 일단 아즈키 나가미츠라 이름붙여진 검이 현존하지 않는다.

- 당대 집필된 도검 서적들에도, 우에스기 가의 기록에도 아즈키 나가미츠 혹은 아즈키로 추정되는 칼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 (선정 35자루의 목록은 근대 이후 정립된 것이라 정식 문서로는 남아있지 않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266153 작성일

모리 토시로의 이름은 전 주인인 모리 테루모토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 모리 토시로가 모리 가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이케다 가에 있던 기간이 더 길다. 모리 테루모토가 소장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케다 테루마사(오오카네히라의 전 주인)에게 준 이후에는 메이지 시대 전까지 이케다 가에서 계속 보관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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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66157 작성일

소하야노츠루기의 대사 중 "내 칼끝을 두려워하라!(我が切っ先を恐れよ!)"는 대사가 있는데, 이것은 전 주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으로 추정.

이에야스는 자신이 죽기 전 "소하야노츠루기의 칼끝을 서국(西国)으로 향하게 두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에야스가 무너뜨린 도요토미 가를 따르던 무장들이 주로 서쪽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경계하여 누르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266162 작성일

오오카네히라는 길이 약 89.2cm로 태도(태도는 보통 60~90cm) 중에서도 긴 편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무척 가볍다. 보통 그 정도 길이면 2kg은 족히 나가는데, 오오카네히라의 무게는 1.35kg 정도밖에 안 된다.

두께를 얇게 만들어 무게를 줄인 것인데, 이렇게 만들 경우 보기는 아름답지만 당연히 칼이 망가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오오카네히라는 그런 손상이 거의 없다. 오오카네히라가 걸작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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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66165 작성일

ㅇ0ㅇ)/ 유용한 스레는 스크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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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66180 작성일

※ 김칠한 부분은 센고 극 편지 스포일러

센고 무라마사의 편지에서 '카츠시게(勝茂) 님'을 언급하는 것은 유명한 무라마사 중 하나인 '묘호 무라마사'의 전 주인이 나베시마 카츠시게이기 때문.

('센고 무라마사'라는 이름 자체는 도공 센고 무라마사가 만든 검의 통칭이기 때문에 주인도 전승도 칼의 생김새도 다양하다.) 

 

무라마사는 '도쿠가와 막부를 저주하는 요도'로 널리 알려졌지만, 우습게도 정작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을 비롯한 도쿠가와 측의 장수들도 무라마사를 곧잘 소유하고 있었다. 가격 대비 성능이 우수해 쓰기 좋은 칼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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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309053 작성일

펍~!!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41 작성일

츠루마루와 쇼쿠다이키리는 다테 가문에 있을 적에는 만난 적이 없다. 쇼쿠다이키리는 마사무네 생전에 미토 도쿠가와로 넘어갔고 츠루마루는 마사무네가 죽고도 한참 후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지만 둘 다 오다 노부나가가 소유했던 경력이 있어, 오다 가문에 있을 적에 만났을 가능성은 있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42 작성일

켄신 카게미츠와 아즈키 나가미츠의 대사 중 '신불의 가호'나 '비샤몬텐의 가호'를 언급하는 건 전 주인과 관련이 있다. 전 주인인 우에스기 켄신이 신불 중 하나인 비샤몬텐(비사문천)을 믿었고 스스로를 그 환생으로 선전하기도 했기 때문에.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43 작성일

도공 유키미츠(후도 유키미츠를 만든 도공)는 도공 마사무네(휴우가 마사무네를 만든 도공)의 친부라는 설이 있으며, 도공 사다무네(타이코가네, 모노요시, 킷코를 만든 도공)는 마사무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혈연으로 정리하면 유키미츠(할아버지) - 마사무네(아버지) - 사다무네(아들)인 셈이다.

 

(단 도공 마사무네의 아버지가 유키미츠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는 설도 있으며, 사다무네 또한 마사무네의 아들이 아니라 제자였다는 설도 있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97 작성일

스리아게, 즉 칼을 갈아내어 길이를 줄이는 작업을 할 때에는 칼의 슴베(칼자루에 박히는 부분)를 갈아 줄인다.

칼끝 쪽을 갈아 줄이는 것은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다(아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칼의 특색이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행위라고 한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98 작성일

다이한냐가 '마시면 지혜가 솟아난다'고 언급하는 음료의 정체는 술.

불교에서 술을 '반야탕(일본어 발음은 '한냐토우')'이라고도 부르기에 언급한 것이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199 작성일

도검난무의 오오쿠리카라는 전 주인을 다테 마사무네라고 언급하고 실제로도 그게 맞지만 일부 일본도 서적에는 전 주인이 마사무네의 아들인 다테 타다무네(타이코가네 사다무네의 전 주인)로 되어 있다.

이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오오쿠리카라를 주기로 했을 때, 실제로 칼을 받은 것이 타다무네이기 때문이다. (히데타다는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니만큼 에도에 있었는데, 당시 마사무네는 본인의 영지인 센다이에 가 있었기에 아들이 대리수령했다) 

 

마사무네 사후 다테 가를 계승한 것이 타다무네이기 때문에 타다무네 소유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200 작성일

쇼쿠다이키리 관련 2차창작에서 종종 나오는 요메이리 네타는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미츠타다를 이쪽으로 시집보내라'고 말해 쇼쿠다이키리를 받아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받아온 것이 요리후사의 아들인 미츠쿠니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시기로 볼 때 요리후사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202 작성일

1.

헤시키리 하세베의 지금 외장(금색+까만색 조합이 칼집 등)은 쿠로다 가에 넘어온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타키기리(미실장)를 비롯한 쿠로다 가문의 많은 명도들이 이런 외장을 갖추었다고 한다. 

 

2.

켄신 카게미츠는 히메즈루 이치몬지(미실장)와 면식이 있을 것. 둘 다 우에스기 켄신이 썼던 칼인데다 둘을 함께 패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시나노 토시로는 1986년에 도둑맞은 적이 있다. 다행히 몇 년 후 범인이 잡혀 시나노도 소장처로 되돌아왔다.

 

4.

이시키리마루를 만들었다는 도공 카와우치 아리나리는 도공 무네치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과 부자간이라는 설이 있다.

 

익명님의 댓글

익명 #309203 작성일

2차창작에서 헤시키리 하세베와 오오쿠리카라를 숙부-조카 관계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도공 관련 네타이다.

도공 하세베 쿠니시게(헤시키리 하세베를 제작)는 도공 소슈 마사무네의 제자였다는 설이 있으며,

도공 히로미츠(오오쿠리카라를 제작)는 도공 소슈 마사무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도공의 혈연관계는 확실히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설이 있다. 히로미츠와 쿠니시게가 모두 도공 신토우고 쿠니미츠의 아들로 서로 형제라는 설, 히로미츠가 도공 마사무네의 손자나 형제라는 설 등등.)

익명님의 댓글

익명 #341169 작성일

유용한 정보펍 ㅇ0ㅇ9 

익명님의 댓글

익명 #341191 작성일

스크랩~!!

익명님의 댓글

익명 #424324 작성일

좋은 스레는 같이 봅시다ㅇ0ㅇ)/

익명님의 댓글

익명 #424325 작성일

쿠와나 고우가 톤보키리를 톤보키리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톤보키리님은 톤보키리님이니까...지만 쿠와나의 전 주인인 혼다 타다마사가 톤보키리의 전 주인인 혼다 타다카츠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도 있을것이다.

 

쿠와나는 타다마사가 쿠와나 번의 번주이던 시절 매사냥을 하다 들른 민가의 신단에 모셔져 있던 칼을 구입한 것. 도첩 설명에 농가에 장식된 적이 있다고 한건 여기서 따온듯.

 

쿠와나의 전 주인은 오사카 전투때 오사카성 주위의 해자를 메꾸는 공사를 맡았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군 292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도요토미의 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라는 통상 대사는 여기서 따온게 아닐까.

익명님의 댓글

익명 #441500 작성일

스크랩 정리하다가 좋은 스레가 보여서 펍0ㅅ0)/

익명님의 댓글

익명 #441525 작성일

오니마루 머리에 뿔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잖아?

어딜 찾아도 안나왔었는데 도록에 보니까 감정상태에 따라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한다더라고

전투같은 상황에서 뿔이 길어지는 일종의 저주라고 써있더라




타이코 사몬지도 데려온지 얼마안돼서 옷 갈아입히면서 놀고 있는데

경장에 꼬리가 안보이더라구

그래서 얘도 도록에 보니까 꼬리가 달린게 아니라 꼬리장식이었어 

(그 누구보다 원숭이 분장에 진심인 이유가 뭐야 원숭이 아니라며)

좌우의 귀걸이도 코우세츠랑 소우자 색이라 너무 귀여웠는데

오사요 색이 없네...하고 도록 뒤져보니까 진짜 짧게 쪼매서 뒤에서만 보이는 머리끈?이 오사요 색이었어


너무 귀여웠어


익명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441528 작성일

사몬지 도파 애끼는 사니와로서 매우 은혜로운 이야기... 진짜 귀요워... 사요컬러도 챙긴다니 진짜 머리끈이 진짜.. 아....

익명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441541 작성일

색 골라서 머리쪼매고 귀걸이 달고 했을거 생각하니까 넘.모.넘모. 기여워....

좋아하는 사니와가 있어서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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